안녕하세요? 김이정 갤러리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공부할 인물은 우리나라 동양화가 소정 변관식입니다.
- 변관식의 생애
변관식은 근 · 현대기에 활동한 화가입니다. 1899년 3월 19일 황해도 옹진(甕津)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호는 소정(小亭)입니다. 한의사 정연(晶淵)과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화원이었던 조석진(趙錫晋)의 딸인 함안 조씨(咸安趙氏)의 둘째 아들입니다.
12세 때 외조부인 조석진을 따라 상경하여 2년 후 어의동(於義洞)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습니다. 수신(修身)시간에 그림을 그리다 일본인 교사에게 발각되었는데, 변관식의 재능을 알아본 일본인 교사는 그에게 일본 유학을 권유했다고 합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조석진이 촉탁으로 있던 관립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 도기과(陶器科)에 입학하였는데 이 때 도자기 제작보다는 도화(陶畵) 그리기에 더 흥미를 보였습니다.
1916년부터 외조부인 조석진 문하에서 조광준(趙廣濬) · 김창환(金彰煥) · 박승무(朴承武) 등과 함께 그림을 지도받았고, 낮에는 외조부가 교수로 있던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에 나가 연구생 자격으로 그림을 배우는 등 본격적인 회화 수련을 거쳤다. 이 시절 변관식은 이상범 ·노수현 등 동년배의 젊은 화가들과 교유하고 일곱 살 위인 김은호와 만났는데, 특히 김은호와는 평생지기의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1918년 한국인 서화가들의 단체인 서화협회(書畵協會)가 창설되자 정회원으로 참여하여 1921년 '제1회 서화협회전(書畵協會展)'부터 지속적으로 작품을 출품하였습니다. 같은 해 결혼한지 2년밖에 안된 부인 현씨가 궁핍한 생활 속에서 병사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1922년에는 총독부에 의해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약칭 조선미전]가 신설되자 변관식은 전통화법으로 그린 <촉산행려도(蜀山行旅圖)>를 출품하여 입선하였습니다.
1923년에는 서화미술회 출신의 이용우 · 노수현 · 이상범 등과 함께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여 '신구화도(新舊畵道)의 충진(忠進)'이라는 기치 아래 전통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였으나, 동연사는 본격적인 활동에 이르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이 시기 동연사가 지향했던 화풍은 변관식이 같은 해 3회 서화협회전에 출품한 <어느 골목>을 통해서 살펴볼 때 일본 남화(南畵)의 사경(寫景)양식을 차용한 사생적 화풍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변관식은 3회와 4회 조선미전에서 잇달아 4등상을 수상하며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를 주목한 서화미술회 명예회원인 이용문이 변관식과 김은호의 일본 유학을 주선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변관식은 1925년 가을 김은호와 함께 동경에 4년간 머물면서 관동(關東) 남화의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에게 사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변관식은 스승의 보수적인 화풍에 공감하기보다는 당대 서양 근대 미술의 유입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신남화(新南畵) 운동에 더 관심을 보였습니다.
1929년 귀국 후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에 출품한 자신의 신남화풍(新南畵風)의 수묵사경화(水墨寫景畵)가 각광을 받지못하고 동년배인 이상범이나 노수현에 비해 화단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데다가, 안석주(安碩柱)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신랄한 평문 「미전인상」(1929.9.10)에 충격을 받아 관전(官展)을 통한 출세를 포기하고 오랜 방랑생활에 빠져들었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전국의 명산대천을 유람하면서 실경 사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화풍을 모색하였습니다. 그가 훗날 금강산을 즐겨 그리게 된 것도 이 때의 유력생활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후 광주 · 진주 · 전주 등 지방을 거점으로 활동하였고, 진주 체재 시절 강씨와 만나 재혼하였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일제강점기에 관전을 외면한 작가로 분류되어 민족정기의 정립을 시대적 당면과제로 삼은 미술계의 굵직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고희동 등이 주도한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창설되자 동양화 분과위원에 위촉되었고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의 창설과 함께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나, 파벌과 정실(情實)로 얼룩진 국전심사의 비리에 반발, 이를 폭로하는 글을 동아일보 「편파적인 심위구성」(1955.10.28), 연합신문 「공정 잃은 심사」(1957.10.21) 등에 잇달아 발표한 후 1957년 국전과 결별하였습니다.
이후 서라벌 예대와 수도여사대에 출강하여 후진을 가르치면서 주류 화단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여생의 대부분을 재야화가로 지냈습니다. 65세 되던 1963년 예총 미술협회 회장에 추대되었고 1964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습니다. 1966년 신세계화랑의 <10대가전(十大家展)>에 출품하였고, 1975년에는 동아일보사 주최로 <변관식 회고전>이 열렸습니다. 이듬해 2월 <내금강 진주담>을 마무리한 직후 타계하였습니다.
변관식 화법의 특징은 첫째, 화면상의 시점이 부감시(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瞰視)에 따른 일종의 심원(深遠)의 형식이면서 다각적인 방향에서의 시점을 구사하여 박진감과 입체파풍의 구조적 해석을 보였다. 둘째, 청전(靑田)과 달리 적묵법(積墨法)에 의해 변화를 주었으며 관념적인 산수가 아니라 엄격한 사경(寫景)을 바탕으로 한 한국적 풍치가 배어났다. 그리고 그러한 산세에 접경되는 인물들은 비탈진 산길을 뒤뚱거리며 올라가는 흰 두루마기의 촌로들이 보여주는 해학적인 풍정에서 진정한 한국적인 야취(野趣)를 맛볼 수 있다. 작품으로는 일련의 금강산 시리즈인 《외금강 삼선암(外金剛三仙岩)》 《내금강 진주담(內金剛眞珠潭)》 《옥류청풍(玉流淸風)》 등과 《이어(鯉魚)》 등의 어해도(魚蟹圖)가 있습니다.
2. 활동사항
작품세계
갈필(渴筆)의 적묵법과 파선법 위에 갈색으로 응결시켜 짙고 거친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화풍은 대체로 3기로 나누어 변천하였습니다.
1917년에서 1936년까지의 초기는 주로 서화미술원이나 일본 유학 등을 통하여 그림 수업을 받으며 자신의 화풍 형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던 전습기였습니다. 남북종(南北宗) 절충 화풍과 서구적 기법이 가미된 일본의 신남화풍이 근간을 이루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이미 거친 화면 처리와 시선의 다각적인 전개 등으로 그의 독자적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922년까지의 변관식의 화풍은 《사계산수도》 10폭 병풍(1920)에서 잘 드러나듯이 정형화된 이상경의 묘사를 특징으로 하였습니다. 장승업과 김영(金瑛)이 청대 사왕오운(四王吳惲)의 화풍을 바탕으로 전형화한 이 남북종 혼합의 원체 산수화풍은 고원(高遠)의 시점, 화면을 꽉 채운 충전식 구도와 치아형의 돌기가 있는 구름모양의 산세가 특징적으로 안중식과 조석진에 의해 계승되어 서화미술회의 주도적인 양식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일본 사생적 리얼리즘에 토대를 둔 일본 신남화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 단초는 1923년의 동연사 결성에 의해서 마련되었지만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신남화 운동이 한창이던 일본으로의 유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유학기간에 선전에 출품한 <옹울(蓊鬱)>(1927), <성북정협(城北靜峽)>(1928), <소사문종(蕭寺聞鐘)>(1929) 같은 작품들을 보면 경물의 과장된 모습, 고사리 형태의 나무 묘사 등 몽환적인 분위기와 갈필(渴筆)의 과잉 등 당시 일본 남화가들의 영향이 짙게 반영되어있습니다.
1937년 서울을 떠나 전국을 여행하면서 실경 사생(實景寫生)을 통하여 자신의 화풍을 다졌던 중기는, 그가 광복 이후 참여하였던 국전을 떠나기 직전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누각정경도(樓閣情景圖)」(1939년)와 「산수춘경도(山水春景圖)」(1944년), 「해금강삼선암추색도(海金剛三仙巖秋色圖)」(1955년)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향토색 짙은 실경을 소재로 적묵법과 파선법이 밀도 있게 다루어졌습니다. 중기에는 관전 응모를 포기하고 전국의 명산대천을 주유하면서 실경사생에 열중하던 시기로 해방 이후 1957년 국전 심사위원을 사퇴할 때까지입니다. 이 시기는 변관식이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을 다졌던 이른바 '소정양식'의 발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부터 향토색 짙은 실경을 서정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는데, 《강촌유거》 6폭 병풍(1939)은 초기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연폭 형식의 이 병풍화에서, 변관식은 중국 화보풍의 정형산수에서 탈피하여 조선의 농촌에서 흔히 발견되는 실경을 횡파(橫坡)의 구도 속에 담채와 갈필, 층층이 쌓아가는 적묵의 기법을 사용하여 표현함으로써 소정 양식의 전형을 예고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무릉춘색(武陵春色)>(1942)을 거쳐 광복 후에도 이어져 <무창춘색(武昌春色)>(1955)에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전주를 여행하면서 그린 <무창춘색>은 <강촌유거>와 마찬가지로 연폭의 병풍 형식에 농촌의 정경을 파노라마식으로 담은 것입니다. <강촌유거>가 복잡한 구성에 여러 개의 시점이 중첩된 전통 회화의 원리에 충실하였던 데 비해 <무창춘색>은 화면의 각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비교적 통일된 시점과 구성을 보여주며 필법에서는 적묵의 완급을 통해 리듬감을 부여함으로써 화폭에 다이나믹한 흥취를 부여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1957년부터 그가 타계하기까지의 후기는, 적묵법과 파선법과 더불어 분방한 호초점(胡椒點)을 즐겨 다루었던 원숙기입니다. 이 시기는 소정양식의 정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부터 변관식은 민족정기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던 금강산을 중심 소재로 다루기 시작하였으며, 소정양식은 금강산의 정화를 표현하기 위한 예술혼의 발로로서 그 모양새를 다듬어 갔습니다. 특히 구도에 있어서 황금 분할식 공간을 시도하기도 하고, 정물의 일부분을 대담하게 부각시키는 등 다양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농가도」(1957년), 동아일보사 소장의 「무창춘색도(武昌春色圖)」, 「외금강삼선암도(外金剛三仙巖圖)」(1970년) 등이 있습니다.
<외금강삼선암추색(外金剛三仙巖秋色)>(1959)은 그렇게 완성된 소정양식의 전형을 잘 보여줍니다. 화면 전경을 수직으로 가르는 거대한 암봉과 그 뒤로 모습을 드러낸 일만이천의 봉우리가 자아내는 자연의 웅혼한 코러스는 농담을 달리한 먹을 겹쳐 가한 적묵법(積墨法)과 먹이 뭉쳐진 부분에 다시 진한 선을 긋고 점을 찍어서 깨는 파선법(破線法)에 의해 그 감동이 극대화되었습니다. 또 산수 곳곳에 한복 차림의 점경 인물들을 배치하여 화면에 활력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행락의 흥취를 북돋우었습니다. 다만 전경의 클로즈업, 전경과 후경의 극단적 대비는 일본화의 구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내금강구룡폭(內金剛九龍瀑)>(1960), <내금강보덕굴(內金剛普德窟)>(1960), <내금강진주담(內金剛眞珠潭)>(1960)도 이 시기를 대표하는 수작들입니다.
변관식은 고희(古稀)를 전후한 말년에 또 한번의 화풍 변화를 꾀하였는데, 토속적인 실제 경관에 도원경(桃源景)을 결합한 한국적 이상향을 그렸습니다. <도림일석(桃林日夕)>(1970년대 전반), <춘경산수(春景山水)>(1974), <산촌신색(山村新色)>(1974)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도화촌(桃花村)의 풍경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횡폭의 시각적 파노라마는 기존의 적묵법과 파선법의 바탕 위에 분방한 호초점(胡椒點)을 곳곳에 찍어 장식적 효과를 내었습니다. 이를 통해 구현된 화폭은 구체적인 실경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감상자의 동경심을 자극하는 이상경으로 다가옴으로써 일종의 정형산수로서의 성격을 갖습니다. 이와 같은 변관식의 새로운 양식은 1970년대 이후 전통과 혁신의 사이에서 갈등하며 새로운 모색에 나섰던 전통화단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한편 1960대에 다져진 변관식 산수화의 전형적 양식이 일본 신남화의 사생적 리얼리즘의 층위에서 싹튼 것인 만큼 소정양식의 미술사적 의의를 고희 이후의 후기 소정양식, 즉 실경과 이상경이 결합된 말년의 화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견해도 제기된 바가 있습니다.
